작성일 : 16-10-18 10:56
(시사인)백남기씨는 왜 그런 삶을 살았을까?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33  
영화 <밀정>이 화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밀정이나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 아저씨가 연기했던 염석진 역을 떠올려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이 갈 거야. 일제강점기 내내 밀정은 항상 넘쳐났고 또 불가사의할 만큼 어디에나 있었단다. 김구 곁에도, 김원봉 주위에도 말이야. 독립운동가들이 비밀 회합을 열면 며칠 뒤 그 전말을 담은 보고서가 일본 관헌 책상에 사뿐히 놓이는 지경이었다니 밀정들의 위력을 알 만하지 않니.

수많은 사람들이 밀정의 삶을 택했어. 1950년대 한국군 특무대장을 지내며 ‘빨갱이 사냥’의 첨단을 달렸던 김창룡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는 멀쩡한 사람도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이는 재주가 있었고, 그 때문에 원성을 사서 다름 아닌 국군 장교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야. 그런데 그는 전직 일본의 밀정이었어. 일본 관동군에서 특별히 훈련받은 정보원이었지. 그 활약상 하나를 들려줄까. 김창룡은 중국 공산당 비밀 조직이 운영하는 식당에 종업원으로 들어가서 영하 30℃가 넘는 만주에서 얼음을 깨고 설거지를 하는 등 열성적으로 일해 주인의 신뢰를 얻었어. 그런 다음, 틈을 보아 주인 이하 공산당원들을 일망타진하는 공을 세운 적이 있어. 무슨 영화 이야기 같지 않니?

구한말 유명했던 여자 밀정 중에는 배정자라는 사람도 있다. 이 여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아버지라 불렀고 경술국치 때 만세를 부를 정도로 일본에 충성스러운, 아니 그냥 일본인이었어. 그녀 역시 일본의 밀정이 되어 만주로 파견됐고 일본군에 맞서던 마적들의 포로가 됐다가 마적 두목을 꼬드겨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어. 만주 일대에 친일 단체를 결성해서 조선인들의 동태를 살핀 악질 밀정이었지.

ⓒ연합뉴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김창룡 특무대장(오른쪽).
그런데 아빠는 그들을 이해해.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는 게 아니야. 그저 그들이 왜 그런 길로 가게 됐는지는 알겠다는 뜻이야. 배정자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반역자로 몰려 죽었고 어머니와 배정자는 노비가 돼 끌려갔어.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눈이 멀었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러다가 만나게 된 일본인들은 소녀 배정자에게는 따뜻한, 그러면서 속 들여다보이는 친절을 베풀었지. 어쨌든 생각해보렴. 부모의 원수에다가 자기를 노비로 처박았던 나라와 자신을 거둬주고 베풀어주고 교육해준 나라. 어느 쪽에 더 마음이 갈까?

김창룡도 마찬가지야. 가난한 시골 농사꾼으로 생을 마치기에는 머리가 비상하고 성실한 청년이었어. 태어나기도 전에 망해버린 옛 나라 따위에 신경 쓰느니 보란 듯이 출세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었고, 구차하고 가난한 조선보다는 세계 강대국의 하나로 휘황하고 번듯했던 일본 쪽에 붙고 싶었던 건 인지상정이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아빠에게는 생각할수록 알 수 없고 궁리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 즉 김창룡이나 배정자같이 바닥 인생들이고, 망한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라고는 쥐뿔만큼도 없으며, 그 일을 하다가 잘못되면 일신이 망가지는 건 물론 처자식들까지 굶어 죽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누가 그 일을 한다고 칭송하는 것도 아니며, 해방된다고 큰 은전을 입을 것도 아닌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떨쳐나선’ 이유야.

매국노 이완용에게 칼을 휘두른 이재명은 수백 년간 격심한 차별을 받았던 평안도 출신에다가 하와이까지 가서 막노동을 했던 바닥 인생이었고, 영화 <밀정>에 등장한 사격의 귀재 김장옥의 실제 모델인 김상옥은 코흘리개 때부터 대장간에서 일을 할 만큼 가난했어. ‘말하는 꽃’ 정도로 천대받던 기생들 일부는 3·1운동 당시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 보고서에 “조선 청년들이 술 먹으러 오면 ‘지금 여러분이 술 먹을 때입니까?’ 꾸짖어 내쫓았다”라고 기록돼 있을 만큼 그들은 열렬했어. 도대체 그들은 왜 그랬을까? 배정자나 김창룡에게는 이유나 있지, 그분들은 무슨 이유로 스스로를 독립운동에 던진 것일까.

아빠는 끝내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하나 분명한 건 있단다. 그건 바로 우리가 오늘 우리말을 사용하고 한글을 써서 역사를 전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이 싸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지. 일본의 일부인 오키나와가 한때 전통의 독립국 류큐였던 것처럼, 세계 역사에는 강대국에 점령된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강대국의 충성스러운 변방이 된 나라와 사람들이 숱하게 많아. 원자폭탄 수십 개가 터지고 일본이 열 번 졌더라도,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진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었어. 생각해보렴. 일본 통치를 양순하게 받아들인 일본의 일부를 미국인들, 영국인들이 왜 독립시켜주겠니.

기억하렴. 역사는 지독한 빚쟁이란다. 시간의 길고 짧음이 있을 뿐이지 빌려준 것(빚)은 반드시 받아내는 채권자야. ‘그럴 이유가 없던’ 독립운동가들의 고단한 삶과 죽음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일상을 그려냈듯, 오늘날에도 제 몸의 편안함을 버리고 험난한 가시밭길, 또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를 걸으며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는 뜻이야. 그런 분 중의 하나라 할 분이 며칠 전 돌아가셨다. 백남기라는 농민이야.

이분은 중앙대 68학번이셨어. 그는 오늘날의 북한 체제만큼이나 혹독했던 유신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두 번씩이나 학교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돼 넝마주이도 하고 포도밭에서 머슴살이도 했다고 해. 그냥 다 잊고 열심히 돈이나 벌고 한세상 살았으면 좋으련만 그는 1980년 복교한 뒤 후배들 수천명을 이끌고 흑석동 중앙대 캠퍼스를 떠나 한강다리를 건너 서울역으로 진격했던 전설의 주인공이었어. 그리고 “의혈(중앙대 학생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수식어)이 한강다리를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라는 자부심의 원천이 된단다. 전두환 정권 때 감옥살이를 하고 학교에서도 쫓겨난 그는 농민의 길을 택해.

ⓒ민중총궐기
백남기씨가 주민들과 함께 춤을 추며 징을 치고 있는 모습(오른쪽에서 두 번째).
“살아남은 자가 무슨 공을 따지겠느냐”


그러나 그는 평범한 농민이 아니었어. 광주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죽은 사람들도 있는데 살아남은 자가 무슨 공을 따지겠느냐”라며 포기했단다. 후배 운동권들이 무얼 하면 출세하고 어찌하면 국회의원이 될까 ‘짱구를 굴리는’ 동안, 그는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고, 전국가톨릭농민회 부회장으로서 농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싸웠단다. 지난해 11월,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한 ‘쌀값 수매가를 가마당 17만원에서 21만원으로 올리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민중대회 참가했다. 그 현장에서 물대포를 맞아 쓰러졌다가 317일 만인 며칠 전 세상을 떠나셨어.

그분은 왜 그런 삶을 사셨을까. 적당히 농사짓고 눈치 봐서 보상받고, 농협 돈 대출받아 대충 요령껏 떼먹고, 개발 정보 있으면 땅 몇 마지기 사뒀다가 졸부가 되는 사람도 숱하게 많았던 시대에, 왜 그분은 고생만 하다가 가셨을까. 그분의 영정 앞에서 또 한번 ‘왜?’라는 질문을 아빠는 여러 번 되뇌었다. 하지만 역시 답은 없었어. 그저 이렇게 중얼거릴밖에.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살아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 정도나마 살고 있습니다.” 그 얼마 뒤 아빠는 혼잣말을 하다가 울컥해서 목에 힘을 주고 말았단다. “그런데 우리가 바보처럼 살아서 선생님을 이렇게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선생님을 죽여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고, 도리어 자기들이 죽였다는 증거가 없지 않으냐며 선생님 몸에 칼을 댈 궁리만 하는 일제강점기 일본 놈 같은 정부를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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